남현동 K씨 스튜디오주택
위치: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1053-25
총층: 지상 2층
대지면적: 389m²
연면적: 188.08m²(60.02평)
전세가: 10억 원 (반전세 전환 가능)
용도: 단독주택
희망용도: 주거, 사무실, 작업실 등
입주: 즉시 입주 가능
방 수 및 욕실수
– 1층: 방1, 거실, 주방, 화장실, 공유마당(외부)
– 2층: 방3, 서재, 화장실2, 다락, 테라스(외부)
방향: 남동향(거실 기준)
교통: 버스정류장 도보로 5분, 사당역(2, 4호선) 도보로 12분
난방(방식/연료): 개별난방/도시가스
주차: 2대 가능
주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사용승인: 1992. 6. 12.
설계자: 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최동규)
리모델링 설계자: 건축사사무소 더사이(이진오)
시공: 2023년 4월 완전 리모델링
- 기본옵션
시스템에어콘 2대(주방, 2층 안방), 벽걸이에이콘 5대(거실 및 각 방)
2층 안방 붙박이장
싱크대 하부장





















남현동 예술인마을은 1969년에 예술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작가 서정주, 이원수, 최순애를 비롯하여 배우 최은희, 이기동, 양훈, 황정순, 조각가 이영일 등 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그 후 관악산 자락에 면한 단독주택 필지에는 인근 서울대학교 교수와 기업인들이 자리 잡았다. 사당역에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사당초등학교, 미당 서정주의 집을 지나 관악산 자락 작은 동산 아래에 남동향의 남현동K씨 스튜디오주택이 있다. 지난 30년간 화가 박경숙 작가와 김미로 작가의 작업실 겸 집이었던 이곳이 지난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 및 증축을 거쳐 2채의 독립 주거로 재탄생하였다. 산 아래에서 단독주택 마을이었던 남현동의 옛 모습을 마지막까지 간직한 이곳은, 가로에 면한 벽돌 아치와 오래된 옹벽의 담쟁이넝쿨이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이 주택은 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 최동규 건축가의 1991년 작품으로, 이번 리모델링은 건축사사무소 더사이의 이진오 건축가가 기존 집의 따스한 느낌과 공간 구조를 최대한 살리면서 현대적인 분위기로 변모시켰다. 오래된 이곳만의 운치를 자아내는 벽돌과 내부의 목재 마감을 거실과 계단실 등에서 최대한 살리고, 부엌, 화장실, 방 등은 기능적 필요에 따라 새로운 재료로 현대적으로 마감했다. 특히 1층은 거실과 주방, 방으로 구성되는데, 스킵플로어 형식으로 살짝 내려간 주방은 넓은 공간에 전면과 후면으로 큰 창을 두어 이 집에서 가장 좋은 풍경과 공간감을 갖고 있다. 2층은 3개의 방과 1개의 서재, 2개의 화장실로 구성되었는데, 스킵플로어의 율동감 있는 변화 속에 각 방들이 연결되고, 전면으로는 넓은 테라스를 갖고 있다.
남현동K씨 스튜디오주택은 전면은 주인집 독채이고, 후면 독채를 전세로 임대하는 것이며, 이 두 건물 사이에 놓인 마당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유마당이다. 스튜디오주택이라는 특징답게 후면 독채는 주거뿐만 아니라 중소규모 기업의 사무실로도 임대사용할 수 있다. 건물 전체 주차는 4대 가능하며, 이 중 2대가 임대세대의 것이다.
리모델링 전 프리뷰 영상
https://youtu.be/RwLmjmWN4hU
남현동 예술인마을
http://namhyeonartvillage.com/
http://tbs.seoul.kr/news/newsView.do?seq_800=10036497&typ_800=R
https://go.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625027006 https://m.blog.naver.com/yechon1968/222328220695
건축가 최동규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8F%99%EA%B7%9C






공굴집
위치: 서울시 성동구 무학봉26길 20
총층: 2층
대지면적: 23㎡
건축면적: 21.19㎡
연면적: 40.36㎡ (1층: 21.19㎡ / 2층: 19.17㎡)
매매가: 6억 원
용도: 단독주택
입주: 협의 가능
방 수 및 욕실
- 1층: 방1, 욕실1, 보일러실
- 2층: 거실, 주방
방: 입구-북동향, 2층정원-남서향
교통: 왕십리역 10번 출구 도보 2분(2호선, 5호선, 수인분당, 경의중앙)
난방(방식/연료): 도시가스
창호: 필로브 3중 창호
주차: 대지 내 주차 불가, 현관 앞 주차 가능(1대 규모)
주구조: 블록조
사용승인: 없음(건축물대장 없음, 건축물등기 있음)
리모델링: 2020년 8월 입주
설계자: 김성진, 안정호
- 기본옵션
천장형 에어컨 2대(1층 침실, 2층 거실)
세탁기 1대
건조기 1대
냉장고 1대
인덕션 1대
비데 1대
CCTV 2개(양도 수락 시 유지, 매달 별도 비용 필요)
- 기타 시설
현관 매립형 택배함
2층 마당
침대 프레임 수납
침실 붙박이장
계단 하부장
싱크대 하부장









일명 쿼트로 역세권이라 불리는 왕십리역(2호선, 5호선, 수인분당선, 경의중앙선) 인근 2층짜리 단독주택을 소개한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이와 아파트, 다가구주택, 단독주택 등을 살아온 이가 합심해 서울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발품 팔아 발굴하고 리모델링해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건축가와 디자이너 부부로, 직접 설계하고 직영 시공했다. 아파트만큼의 포근함과 단독주택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이 집의 이름은 공굴집이다. 빌 공(空) 자에 동굴 굴(窟) 자를 써서 아늑한 동시에 비어있는 집을 뜻한다. 현 소유자는 2020년 8월 공사를 마무리하고 입주해 약 28개월째 살고 있다.
소유자이자 건축가는 반듯한 사각형 대지에 반듯한 2층 건물이란 조건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리모델링을 하며 천장을 철거하니 상량문이 이 집의 역사가 1963년에 시작되었음을 알려줬다. 하지만 이곳 필지는 이미 1911년 경원선 독도역으로 시작된 지금의 왕십리역 일대 도시화 지역의 일부로서, 공굴집의 현재의 필지는 1947년 항공사진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조직을 간직하고 있다. 일대의 도심한옥과 근대가옥들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공굴집 남쪽과 서쪽의 골목들은 해방 이후 도시의 확장 속에서도 원래의 모습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다. (하단 항공사진은 1974년도 공굴집 일대 모습)
공굴집은 줄곧 주택으로 쓰였다. 대신 방이 몇 개로 쪼개져 있고, 현재 2층 마당 부분을 불법 증축해 화장실로 쓰고 있는 게 문제였다. 이들은 리모델링하며 방을 트고 불법 증축 부분의 천장을 걷어낸 뒤 야외 마당을 만들었다. 또한 낡은 지붕을 철거하고 트러스로 튼튼하게 구조 보강한 뒤 새 지붕을 덮어 안전성을 높였다. 1층에는 안방과 분리형 욕실을, 2층에는 거실과 주방을 두었다. 이 배치가 어쩐지 의외라고 여길 수 있는데, 이들은 2층 마당이 남향이기에 거실에서 볕을 한가로이 즐기기에 제격인 배치라고 답했다. 마침 마당을 가로막은 건물도 없어 오전부터 오후까지 햇살을 즐길 수 있다. 대신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고자 유리블록으로 벽을 쌓았다. 재택근무를 할 때면 2층으로 출근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계단 하부장, 싱크대 하부장, 붙박이장 등 구석구석 수납공간을 마련했고 1층 현관 앞에는 매립형 택배함도 만들었다. 신발 벗는 공간은 넓게, 필요 없는 창은 없앴다. 보안과 안정감이 한층 강화됐다.
주택이 즐비한 집 앞 조용한 골목을 벗어나면 왕십리 오거리의 활기가 성큼 느껴진다. 2분만 걸어 나가도 행당시장부터 성동구청, 성동구립도서관, 소월아트홀, 서울성동경찰서, CGV, 왕십리역 등의 간판이 보일 만큼 역세권이다. 바로 앞 골목에는 동네 마트, 노란 불빛 가득한 카페가 여럿 있다.







아리움 사옥(구 서산부인과)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7가 11-6
총층: 지하 1층, 지상 5층
대지면적: 159.7m²
건축면적: 116.79m²
연면적: 574.92m²
매매가: 100억 원
용도: 근린생활시설
지역: 일반상업지역
지구: 중심지미관지구 외
구역: 지구단위계획구역
입주: 협의
방향: 남동향(주된 출입구 기준)
교통: 동대문역사문화공원(2호선) 3번 출구 바로 앞
난방: 개별난방/전기
주차: 불가능
화장실: 내부(층별 1개소씩)
기타시설: 베란다
주구조: 철근콘크리트구조
사용승인: 1966. 9. 24.
설계자: 김중업










서산부인과 의원 건물은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1965년 설계해 1966년 준공되었다. 건축주였던 서병목은 김중업의 부인과 친척으로, 병원과 주거 용도의 건물을 의뢰했다. 모서리가 없이 둥글둥글한 곡선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때로는 복도의 폭은 층마다 공간마다 달라지고, 실들의 구성은 자의적인 듯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발코니와 대기실 등의 공간도 마치 태아가 자궁에 있는 모습을 연상하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분히 출산과 생명을 상징하는 산부인과의 성격을 상징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1층에는 의사와 간호원실, 대기실과 실험실이 있었고, 2층에는 수술실과 5개의 병상, 3층은 주로 병상으로 계획되었으며, 4층에는 의사의 집이 있었다. 램프와 주요 실들로 구성된 메인 볼륨 외에 양측에 달린 발코니가 이 건물의 독창적인 형태를 더욱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게 한다. 발코니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할 정도로 얇은 두께로 버티고 선 좌측의 발코니는 마치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 같은 느낌으로, 가우디 건축의 영향임을 짐작케 한다. 특히 모형에서 보이는 옥상 부분의 굴뚝도 그러한데, 가우디로부터는 자유분방한 곡선을, 꼬르뷔제로부터는 공간을 연결해 주는 빛의 램프를 가져와 다시 ‘김중업스러운’ 건축으로 재창조했다 하겠다.
도로면의 외관은 대부분 당시의 기술로는 소화하기 어려웠을 곡선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원래의 모형을 보면 천창까지 이어지는 유리창이 인상적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콘크리트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당초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단일 용도의 건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낙후되는 외장을 개선하기 위해 몇 번의 칠이 더해졌다.
– 임형남, ‘김중업의 서산부인과’, 건축사신문 요약 발췌
건물 소개
현 소유자는 1995년 서병목 원장으로부터 건물을 매입한 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다. 명함 디자인 및 제작 업체 아리움의 대표인 그는 이 건물을 자사 사옥과 임대용 공간으로 섞어 운영해 왔다. 창호는 1995년 후 매수 후 모두 교체했지만 원래의 모듈과 크기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또 임대용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외부형태처럼 곡선으로 내부공간을 구획했던 벽면은 현재 모두 철거된 상태이지만, 바닥에는 당시 내부 벽면들의 경계를 알 수 있는 여러 패턴과 곡선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1층은 예전에 스포츠용품 매장과 식당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아리움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건물 왼쪽 후면에 있는 출입구는 건물을 사용하면서 차후에 새로 만들어진 부분이며, 이 외에 건물 외관의 형태적 변화는 없다. 2017년 문화재청은 이 건물의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국가 등록문화재 등록 예고를 했지만 소유자가 동의하지 않아 등록하지 못했다.
본래 이 건물은 산부인과 의원이었기에 내부에 여러 개의 병실과 진료실로 작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것이 현재 아리움 사옥으로 변용되면서 내부의 벽체가 모두 철거되고 층별로 하나의 큰 공간으로 통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범용적인 공간의 쓰임새는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되었다.
공공에서 이 건물을 활용할 경우 동대문지역의 여러 문화와 산업을 기반으로 건축과 역사가 어우러진 콘텐츠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건물의 후면으로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고 있는 만큼 여러 역사의 층위가 맞물려 있다. 성북구에 있는 김중업 건축문화의집보다 접근성과 상징성 측면에서 훨씬 더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
이 건물의 민간 활용은 건물의 복원 작업이 일정 부분 선행된다면 건축과 디자인, 패션, 문화 등의 분야를 기반으로 1960~70년대 문화를 쫓는 대중들이 문화적 소비점과 맞물려 다양한 형태의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
김중업은 한국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건축가이다. 1952년부터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서양의 현대건축을 직접 체험하고 한국에 귀국한 이후,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해 나갔고, 그의 몇몇 작품들은 세계 건축계에 소개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을 성취하였다. 195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타계할 순간까지 담배 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온 그의 건축물들은 그의 영혼이 함축되어 있는 그 충일함의 표현이었고, 그 강렬한 작품성 때문에 지금도 그 앞에 서면 심원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김중업은 건축가 김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건축에서 거장의 시대를 열어갔던 인물이다.
그는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1957년 4월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김중업 건축작품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작품전을 열고 그 동안의 작품과 프랑스 정부가 만든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선보였다. 안양김중업박물관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옛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 한 건물로, 김중업이 설계하였다. 또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에 김중업건축문화의집이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김중업의 작품은 아직 없다.
연희동주택
위치: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187-12
총층: 지하 1층, 지상 2층
대지면적: 430m²
건축면적: 138.99m²
연면적: 317.18m²
매매가: 63억 원
용도: 단독주택
입주: 협의 가능
방 수 및 욕실수
– 지층: 다목적공간 및 실내차고, 화장실2
– 1층: 방3, 거실, 메인주방+보조주방, 다이닝실, 화장실2
– 2층: 방2, 거실, 응접실(가족실), 부속주방, 워크인 클로젯, 화장실2, 파우더룸
방향: 남동향(거실 기준)
교통: 버스정류장 도보로 3~4분, 홍대입구역(2호선) 차량으로 10분
난방(방식/연료): 개별난방/도시가스
주차: 3대(내부 2대, 외부 1대)
주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사용승인: 1993. 11. 11.
설계자: 범진.다산.성창 종합건축사사무소
리모델링: 2011년 10월 8개월간 완전 개축 및 조경 공사
– 지붕: 천연슬레이트
– 창호: 이건창호(4PAIR CLASS)
– 외부 마루: 브라질산 이페목
– 내부 마감
문틀 및 문짝: 마호가니
원목 계단: 부빙가
마루 및 화장실 타일: FIANDRE사의 향균/향취 대리석타일
– 설비
천장형 에어컨 총 16대 및 스탠드형 에어컨 1대(기사대기실)
실내공기 순환용 덕트 환배기장치
오디오용 전기설비
장수명 LED 전구
보일러 3대(층별 1대)
세콤



















서울에서 몇 안 되는 호젓한 주택가인 연희동. 궁동근린공원의 오르막 초입인 연희동 187-12에 자리한 본 단독주택은 1993년 지어진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단독주택이다. 현재 소유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건축가로, 2011년 이 집을 매입한 후 직접 섬세하게 리모델링 설계를 하고, 시공까지 직영으로 마무리했다. 외관과 형태를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내부는 8개월에 걸쳐 새로운 쓰임새와 그들의 삶을 담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지금까지 그의 개인 작업실과 주거로 사용 중이다.
원래 이 집의 마당은 지금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했다. 하지만 2011년 건축가는 목재 패턴으로 잘 짜인 대문을 들어서 작은 수공간을 지나 마당에 이르도록 외부공간의 높낮이와 조경을 새로 구상하면서 현재 높이로 마당을 다시 조성하였다. 새로운 마당에 풍경의 운치를 더하는 소나무를 곳곳에 심고, 목재 데크로 영역성과 활동성을 만들어 냈다. 건물의 형태를 보존했지만 지붕은 천연슬레이트로 모두 교체할 만큼 오랜 시간을 내다보고 이 집을 가꿔왔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30년 가까이 된 주택이지만 건축가의 집이라는 배경 때문에 내부공간이 꾸준히 유지 관리되어 말끔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가꿔왔다는 데 있다. 매입 당시 내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목재의 도어와 몰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방음 방온을 위해 4중 유리창(4 PAIR GLASS)로 설계하고, 미세먼지 경고 시 실내공기 순환용 덕트 환·배기장치를 설치했다. 특히 소유자는 오디오 수집과 LP 음악 감상이라는 취미를 위해 방음과 방온에 각별하게 신경 썼는데, 오디오를 위한 전기설비를 별도로 인입하여 벽에는 110V와 220V의 콘센트를 함께 설치했다.
1층에 베드룸 3개와 2층에 베드룸 2개가 있으며 층마다 거실과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다. 1층 부엌에서는 오히려 내부공간을 줄여 외부에 작은 후원을 조성하고 여기에 대나무를 심었다. 집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이런 차경요소와 작은 천창을 두어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원래 마스터 베드룸이 1층에 있었지만, 현재 소유자는 이를 게스트룸으로 사용하고 전망이 좋은 2층 방을 마스터베드룸을 사용 중이다.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한 집의 특성상 2층은 전면 시야가 확 열려 있는데, 동쪽으로 안산이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멀리 연희동 일대가 굽어보인다.
과거 박정희 정권시절에 이 지역에 군인이 많이 살아 장군마을로 불렸다는데, 그래서 유사시 공습을 대비한 지하공간을 각 집마다 두었다고 한다. 이 집 또한 이런 다목적 공간이 지하에 있다.
군산 김기옥 주택
[본채]
위치: 전북 군산시 신창동 41-3
총층: 지상 2층
대지면적: 247.3m²
건축면적: 134.21m²
연면적: 215.53m²
매매가: 1억 8천만 원
용도: 단독주택
입주: 협의 가능
방 수/욕실 수: 4/2개 (길과 면한 사무실 1개 별도)
방향: 남향(거실 기준)
난방: 개별난방/도시가스
주차: 0대
주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지역/지구: 일반상업지역/중점경관관리구역
사용승인: 1976. 8. 25.
설계자: 미상
[별채]
위치: 전북 군산시 월명동 3-3
총층: 지상 1층
대지면적: 117.4m²
건축면적: 69.09m²
연면적: 69.09m²
매매가: 7,200만 원
용도: 단독주택
입주: 협의 가능
방 수/욕실 수: 4/2개 (길과 면한 사무실 1개)
방향: 남향(거실 기준)
난방: 개별난방/도시가스
주차: 0대
주구조: 벽돌조
지역/지구: 일반상업지역/중점경관관리구역
사용승인: 1961. 1. 1.
설계자: 미상

















‘김기옥 주택’은 근대도시 군산의 건축자산이 밀집한 구도심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제가 바다를 매립해 만든 계획도시로, 일찍이 전북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아직까지 당시 목조건물과 근대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어 여행자들의 방문이 많은 곳이다. ‘김기옥 주택’은 1974년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2층 단독주택으로, 당시 군산 도심의 필지 규모를 감안하면 꽤 큰 규모로 지어진 집에 속한다. 현재 월명동 주민센터 바로 앞에 자리하고, 주변부에는 군산의 시간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식당 등이 밀집해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초원사진관과 불과 200미터 거리다.
‘김기옥 주택’은 전북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김기옥 변호사의 사무실이자 자택이었다. 당시는 바로 맞은편인 현 월명성당교육관 자리에 법원이 있었고, 군산에 자리를 잡은 김기옥 변호사는 법원 앞에 사무실과 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1957년 경향신문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를 보면 그를 열정적인 인권 변호사로 묘사하고 있다. 1956년 8.13 지방선거 당시 자유당이 저지른 ‘정읍 환표사건’을 변호하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그의 노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후 그는 인권변호사로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1971년 신민당의 김제 지역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는데, 이때 6~7대 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장경순과 경합했다. 이런 활동배경 때문에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맞붙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운동을 위해 군산을 찾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김기옥 씨와 함께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5년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북지부 결성 시 고문으로 동참하는 등 이후에도 그는 계속 민주화를 위해 변호사로의 활동과 정치 활동을 함께하였다. 1988년 6월 23일 동아일보에 기고를 통해 ‘긴급조치 구형에 장단 맞춘 재판장, 새 대법원 구성에서 제외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고, 전주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99년 별세하였다.
‘김기옥 주택’ 본채는 변호사 사무실과 주택을 겸하기 위해 길 쪽으로 두 개의 문을 두고 있다. 마당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는 문과 사무실로 바로 출입하는 문을 두고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단독주택이지만 이런 구조를 활용하면 골목에 면해 상업적 용도의 활용도 고려할 수 있다.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도심에 자기만의 마당을 갖고 있으며, 1~2층에 위치한 방의 크기 또한 큰 편이라 군산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의 활용도 가능하다.
또한 본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별채는 1층 규모의 단독주택으로, 같은 골목 앞뒤로 맞주하여 골목을 중심으로 함께 상호보완적인 용도로의 활용을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지적인 사람 김기옥 (경향신문, 1957.2.17)
정읍 환표사건은 선거 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으리 만큼 시시비비가 벌어진 끝에 오는 이십삼일 드디어 언도공판이 전주지법에서 개정되게 되었다. 그런데 동사건에 대한 제칠회까지의 공판과 전후삼회에 걸친 현장검증과 증인심문이 계속되는 동안 누구보다 못하지 않게 애쓰고 사건 진상 규명에 활약한 사람은 동사건 담당변호인들일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에 남못지않게 사건을 파고든 사람은 젊은 변호사 김기옥 씨였다. 사명의 변호사 중 수석격 변호인이라고 불리운 김씨는 증인심문 때 상호 모순되는 대부분의 증언을 색출하여 방청인의 폭소와 찬사를 샀던 것이며, 과연 결심과 재결심 때의 변론에서는 피고들의 하고 싶은 말을 빠짐없이 주장해주고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증인들의 증언이 위증임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주시내 아니 전국적으로 클로즈업 되었던 김씨였다. 김씨는 퍽이나 열정적이며 이지적인 사람이다. 그는 제일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개업하고 현재 군산에 사무소를 내고 있는데 앞으로 활약과 진출이 기대되고 있다.










군산 김기옥 주택 별채(월명동 3-3) 모습